- ― 라이파이에서 한동훈까지, 대한민국이 기다리는 새로운 보안관
필자가 어린 시절 즐겨 보았던 만화 가운데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가 있었다.
김산호 화백이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총 4부 32권으로 완성한 「라이파이」는 당시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국형 공상과학 영웅만화였다. 악당들이 세상을 위협하면 라이파이는 주저하지 않고 나타나 불의에 맞섰다. 그의 세계에서는 선과 악이 분명했고, 악은 반드시 심판받았으며, 정의는 끝내 승리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단순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폐허와 가난을 딛고 일어서야 했던 당시 어린이들에게 라이파이는 단순한 만화 주인공이 아니었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정의가 살아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 시대의 상징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라이파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81432)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는 보안관이 있었다. 법과 제도가 미처 뿌리내리지 못한 혼란 속에서 총잡이와 악당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존재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슈퍼맨과 로보캅 같은 영웅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시대와 국가는 달라도 사람들이 정의의 사자를 기다리는 이유는 같다.
현실의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힘 있는 자들이 책임을 피할 때, 거짓이 진실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낼 때 사람들은 누군가 나타나 단호하게 진실을 말하고 불의를 바로잡아 주기를 소망한다.
최근 한동훈 무소속 국회의원의 활약을 지켜보며 필자는 오래전 만화 속 라이파이를 떠올렸다.
여론조사 1위가 말해주는 것
한국갤럽이 2026년 9월 1일부터 3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1명을 대상으로 장래 정치 지도자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한동훈 의원이 9%로 1위를 기록했다.
뒤를 이어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7%, 오세훈 서울시장이 5%,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각각 4%를 기록했다.
이 조사는 후보 명단을 제시하지 않고 응답자가 직접 인물을 말하는 자유응답 방식으로 진행됐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였으며, 특정 인물을 답하지 않은 의견 유보층은 55%였다. 따라서 한동훈 의원의 1위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를 압도적인 대세론으로 확대해석해서는 안 된다. 아직 국민 절반 이상이 마음을 정하지 않은 유동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혼전 속 선두’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한국갤럽 데일리 오피니언 제674호](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657)
그럼에도 이 결과가 가볍지 않은 것은 국민이 왜 지금 한동훈이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현재 국민의힘 소속이 아닌 무소속 초선 국회의원이다. 강력한 정당 조직이나 집권세력의 지원을 등에 업은 위치도 아니다. 그런데도 장래 정치 지도자를 묻는 자유응답 조사에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인기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기존 정치권의 낡은 문법과 무기력한 견제에 대한 국민적 실망, 권력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 직설적인 언어, 각종 의혹에 대해 자료와 논리를 앞세워 파고드는 그의 정치 방식에 대한 기대가 일정 부분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하나의 해석이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국민이 누구를 선택했는가 못지않게 왜 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는가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대한민국 정치에도 보안관이 필요한가
오늘의 대한민국은 미국 서부 개척시대가 아니다. 총을 든 악당이 마을을 습격하고 보안관이 결투로 질서를 되찾는 시대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다른 모습의 무법이 존재한다.
거짓을 반복해 진실처럼 만드는 언어의 무법, 다수의 힘으로 절차와 상식을 밀어붙이는 권력의 무법,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상대에게만 엄격한 이중잣대의 무법이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회피하고, 의혹을 밝히라는 요구를 정치공세로 몰아붙이며, 국민이 납득하지 못한 일을 수적 우위로 정당화하려 한다면 민주주의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그 정신은 병들기 시작한다.
이럴 때 야당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책무는 타협이 아니라 견제다.
견제는 국정의 발목을 잡는 행위가 아니다. 권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폭주하지 않도록 멈춰 세우는 민주주의의 제동장치다. 자료를 확인하고, 모순을 찾아내고, 국민을 대신해 끈질기게 질문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본분이다.
최근 한동훈 의원이 각종 현안과 의혹을 제기하며 보여준 빠른 대응과 직설적인 화법은 기존 정치의 무기력함에 지친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주장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 확인과 반론은 당연히 필요하다.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 역시 증거와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권력자가 불편해하는 질문을 던지고, 거대 조직과 맞서며, 자신의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은 오늘의 정치권에서 보기 드문 장면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어쩌면 한동훈이라는 개인보다 ‘두려움 없이 질문하는 정치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의의 사자가 경계해야 할 것
그러나 정치인을 만화 속 영웅과 완전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라이파이나 슈퍼맨은 절대적인 선을 상징하지만 현실 정치인은 누구나 실수하고 욕망하며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는 인간이다. 영웅을 향한 기대가 무비판적인 숭배로 변하면 또 다른 권력의 오만을 낳을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영웅이 나라를 구하는 체제가 아니다. 시민과 언론, 국회와 사법기관이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공동체의 질서를 지켜나가는 제도다.
따라서 한동훈 의원이 진정한 정치 지도자로 성장하려면 날카로운 공격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능력과 함께 국민의 삶을 개선할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잘못에도 같은 잣대를 적용하고, 불리한 사실도 인정하며, 자신이 틀렸을 때는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한다.
정의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자신의 편이 저지른 불의에는 침묵하면서 상대의 허물만 공격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진영의 무기다. 과거의 검사처럼 혐의를 밝혀내는 데 머물지 않고, 정치인으로서 갈등을 조정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도 보여주어야 한다.
보안관에게는 악당을 제압하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대통령에게는 국민 전체를 품는 절제와 통합의 지혜가 필요하다.
국민이 기다리는 사람
필자가 어린 시절의 라이파이를 떠올린 것은 한동훈 의원을 무결점의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국민이 왜 다시 정의의 사자를 기다리는지를 묻고 싶어서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특별한 영웅을 갈망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가 공정하게 작동하고 지도자들이 상식과 염치를 지킨다면 시민은 보안관이나 슈퍼맨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의가 반복되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때, 거짓과 궤변이 진실을 압도할 때, 권력을 감시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눈치를 볼 때 국민은 강하게 싸울 수 있는 인물을 찾는다.
한동훈 의원의 여론조사 1위는 그에게 보내는 축하장이라기보다 기존 정치권 전체에 보내는 경고장일 수 있다.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말라.”
“국민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대신 물어라.”
“잘못한 사람에게는 지위와 진영을 가리지 말고 책임을 물어라.”
이것이 국민이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동훈 의원에게도 이번 결과는 영광이기 전에 무거운 시험이다. 9%의 선호도를 자신에 대한 완전한 지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특정 인물을 선택하지 않은 55%의 국민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기다리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말의 승리보다 국민의 삶을 바꾸는 정책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정치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정치로 응답해야 한다.
라이파이는 만화 속에서 악당을 물리치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 지도자는 그 이후의 세상까지 책임져야 한다.
불의를 향해서는 칼날처럼 날카롭되 국민을 향해서는 따뜻해야 한다. 권력에는 단호하되 약자의 목소리에는 겸손해야 한다. 자신에게도 같은 정의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한동훈은 순간적으로 주목받는 정치인을 넘어, 대한민국호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국민이 기다리는 것은 또 하나의 권력자가 아니다.
힘 앞에서도 진실을 말하고, 불의 앞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새로운 시대의 ‘정의의 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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