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로다운 원로가 없고, 염치를 잃은 지도층만 남은 사회
글/지형덕/시사k뉴스 기자
한 사회의 몰락은 반드시 경제지표의 추락이나 제도의 붕괴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더 두려운 몰락은 사람들의 내면에서 시작된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피하며, 거짓을 말하고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을 때 사회의 정신적 토대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 사회가 겪는 가장 깊은 위기는 경제도, 저출생도, 이념 갈등도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면서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을 바꾸는 ‘의식구조의 붕괴’다.
원로다운 원로는 어디에 있는가
원로는 단순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권력을 오래 누린 사람도 아니며, 높은 자리를 여러 번 거친 사람을 뜻하지도 않는다.
원로란 시대의 욕망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공동체가 가야 할 길을 밝혀주는 사람이다. 자신이 속한 진영이 잘못했을 때 더 엄하게 꾸짖고, 젊은 세대가 길을 잃었을 때 삶의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를 건네며, 국가가 위험한 갈림길에 섰을 때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버리고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진정한 원로의 말에는 자기희생의 무게가 있어야 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은 채 후배들에게 희생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훈계일 뿐이다. 권력 가까이에서는 침묵하다가 권력이 멀어진 뒤에야 정의를 외친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뒤늦은 자기변명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원로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있어도 진영의 대변인으로 소비되고, 정파의 이익에 따라 선택적으로 분노한다. 국가 전체를 걱정하는 큰 어른보다 자신이 속한 편의 승리를 걱정하는 늙은 정치인이 더 많이 보인다.
사회에 노인은 많아졌지만 존경받는 어른은 드물어졌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쓸쓸한 현실이다.
후천성 염치결핍증에 걸린 지도층
‘염치’란 자신의 잘못을 알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다. 법률보다 먼저 인간을 붙잡아주는 내면의 기준이며, 권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막는 마지막 도덕적 제동장치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후천성 염치결핍증’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잘못이 드러나도 사과하지 않는다.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면 부하와 제도, 전임자와 상대 진영의 탓으로 돌린다. 자신에게 적용되는 법과 국민에게 적용되는 법이 다르고, 자신의 특권은 능력이라 말하면서 국민의 작은 허물에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말은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행동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 집중되어 있다. 어제 했던 말을 오늘 뒤집고도 정치적 판단이었다고 설명한다. 거짓이 밝혀져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실패하고도 성과를 홍보하며, 책임질 위치에 있으면서도 책임질 권한은 없었다고 항변한다.
처음부터 염치가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시민이었을 때는 상식과 부끄러움을 알고 있었지만, 권력과 특권을 오래 누리는 과정에서 그것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선천성’이 아니라 ‘후천성’ 염치결핍증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염치 없는 행동이 반복되면서 그것이 능력처럼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 뻔뻔함은 추진력으로, 궤변은 논리로, 책임 회피는 정치력으로 포장된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다음 세대는 잘못된 교훈을 배우게 된다.
“부끄러워하면 진다.”
“사과하면 책임져야 한다.”
“끝까지 버티면 결국 살아남는다.”
이런 인식이 사회의 행동 원리가 되는 순간, 공동체의 도덕적 기반은 서서히 침몰한다.
의식구조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인간의 의식은 생각과 감정, 기억과 가치 판단이 서로 연결된 내면의 구조다. 건강한 의식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자신의 욕망을 성찰하며,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고, 행동의 결과에 책임지게 한다.
하지만 욕망이 양심을 압도하면 의식구조는 왜곡된다.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받아들이고, 불리한 진실은 거짓으로 규정한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으며, 상대를 악으로 만들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도 특별히 사악한 인간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질문하기를 포기하며, 조직과 명령 뒤에 자신을 숨길 때 평범한 사람도 거대한 악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진정한 위험 역시 여기에 있다. 국민이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진영이 제공하는 언어를 반복하고, 지도자가 사실보다 충성을 요구하며, 언론이 진실보다 편 가르기에 매달릴 때 집단적 사고는 멈춘다.
정치가 상대를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제거하는 일이 되고, 언론이 사실을 밝히는 일이 아니라 분노를 판매하는 일이 되며, 지식인이 진실을 말하기보다 권력 주변에서 자리를 구한다면 사회 전체가 거대한 자기기만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대한민국호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루어낸 놀라운 나라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경제를 일으켰고,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세웠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와 기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배가 크고 빠르다고 해서 반드시 올바른 항구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항해에는 방향이 필요하고, 방향을 지키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대한민국호의 선체는 아직 튼튼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타실에서는 서로 키를 빼앗으려 싸우고, 갑판에서는 승객들이 편을 나누어 상대를 적으로 여기며, 경험 많은 항해자들은 침묵하거나 어느 한쪽의 박수만 기다리고 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 묻는 사람마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만 말하고 국가의 백년을 말하지 않는다. 행정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규정을 앞세우고, 지도층은 국민에게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특권은 내려놓지 않는다. 청년들은 미래를 믿지 못하고, 노년은 불안을 품고 살아가며, 국민은 국가보다 각자의 생존을 먼저 걱정한다.
이대로라면 대한민국호는 당장 침몰하지는 않더라도 목적지를 잃은 채 거친 바다를 떠돌 수 있다.
다시 염치를 국가의 나침반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은 거대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며, 지도자가 국민보다 먼저 희생하는 데서 시작된다.
원로들은 자신이 속한 진영의 잘못에도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지식인은 권력의 언어를 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이 감추려는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언론은 분노를 키우기보다 사실을 지켜야 하며, 시민은 자신이 지지하는 편의 잘못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도층은 염치를 회복해야 한다.
염치는 나약함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이며, 공동체의 신뢰를 지키는 힘이다. 사과는 패배가 아니고 책임은 처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 오히려 역사 앞에서 더 크게 남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문제의 정답을 아는 영웅이 아니다. 자신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지도자, 국민의 아픔 앞에서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지도자, 다음 선거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지도자다.
그리고 그런 지도자를 기다리기 전에 시민 스스로도 물어야 한다.
나는 내가 지지하는 사람의 잘못에도 분노하는가.
나는 사실보다 내 편의 승리를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침묵함으로써 부끄러운 현실에 동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너진 의식구조는 법률 하나로 고칠 수 없다.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서 부끄러움을 회복하고, 진실을 직시하며, 책임을 받아들이는 성찰이 시작되어야 한다.
대한민국호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염치를 잃은 나라는 방향을 잃고, 어른을 잃은 사회는 미래를 잃는다.
이제 대한민국은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나라를 다음 세대에게 남길 것인가.
그리고 오늘 이 배의 키를 잡은 사람들은 역사의 질문 앞에 떳떳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호의 목적지는 지도층 몇 사람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하지 않는 시민, 진영을 넘어 바른말을 하는 원로,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가 함께 나침반을 바로잡을 때 비로소 이 배는 미래라는 항구를 향해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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